지난 8.15 제75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김원웅 광복회장이 기념사를 통하여 "이승만이 친일파와 결탁하여 반민특위를 해체 시켜, 이 미완의 역사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라고 일갈하자 여야가 그럴 수 있다. vs 편 가르기라고 갑론을박에 열을 올리고 있다.
-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난 것일까?
1948년 제헌의회에서는 대통령을 국회에서 간선제로 선출하였다. 초대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의원들에 의해서 선출된 분이다. 그의 권좌는 국회의원들의 지지로 유지될 수 있는 시스템이다.
제헌의회에 한국민주당이라는 한민당이 있었다. 한민당은 일제시대 일정에 협력한 친일 자본가세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948년 9월 22일 반민족행위 처벌특별위원회가 결성되었고 반민특위는 제일 먼저 노덕술을 비롯한 친일경찰들을 잡아들였다. 다음 차례는 친일 자본가들이 잡혀갈 위기감이 고조되었다.
이들의 정치적 집합체인 한민당은 이승만에게 "빨갱이를 잡는 경찰을 잡아넣는 반민특위야말로 진짜 빨갱이다."라고 모함하였다.
국회의원의 지지 위에 권좌가 유지되는 이승만으로서는 한민당의 소리를 가볍게 넘길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대통령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 반민특위활동을 못하게 할 명분이 서지 않았다.
마침 그 당시 이승만의 통일정책이 북진통일이었는데 반민특위 국회의원들의 통일주장이 평화통일이었고 남로당의 통일 구호가 평화통일이었다.
이것을 구실로 반민특위를 빨갱이로 엮어서 1주일 만에 노덕술을 비롯한 친일경찰을 석방하고 이 친일경찰들이 반민특위를 습격 해체 시켜 버렸다. 친일경찰의 후예들이 독재정권의 첨병 역할을 한 것이다.
1952년 5월 26일 부산정치파동을 일으켜 간선제를 직선제로 바꾸었다. 이승만은 한강 다리 폭파사건, 국민방위군 사건, 거창 양민학살사건 등으로 국회의원들로부터 지지가 떨어지자 직선제 개헌을 반대하는 국회의원들을 국제공산당과 연계되었다고 구속하고 기립으로 개헌했다.
한국사 교수 박중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