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 구미인동의 문화재 '모원당'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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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인동의 문화재 '모원당'을 찾아서~

격동의 세월을 살았던 장현광 선생의 흔적을 찾는다.
기사입력 2019.06.22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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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시 인동동행정복지센터 아래쪽에 자리한 ‘모원당’은 도시가 확장되면서 주위에 하나둘씩 아파트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모습을 연출하고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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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사랑방을 지나 잠시 주방을 엿보니 현대식 주방이 가지런하게 설치되어 있다. 사랑방에 걸린 전등도 그렇지만 주방의 싱크대는 관리인의 깔끔한 성격이 묻어나는 것에서부터 고택에 현대적 시설이 절묘하게 어우러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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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닫혀 있었던 대문이 오늘은 보호수 작업을 한다고 활짝 열려 있었다. 기분 좋게 열려있는 대문을 들어서니 반갑게 맞아주시는 관리인 할머니는 자리가 불편하다고 걱정부터 한다. 깊게 우려낸 국화차를 내놓으면서 사랑채에 사람이 없다보니 볼 것도 없다는 말부터 먼저 꺼낸다.
 
현재 모원당을 관리하고 계시는 할머니는 인근 대구에서 살다가 3년 전 관리하던 사람이 없어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이곳으로 왔다고 한다. 대를 이어서 종손들이 관리하고 있지만 혼자 생활해야 하기에 적적한 것은 어쩌지 못하는 것이다.
할머니에게 혼자 생활하시는 것이 외롭지 않느냐는 질문을 했다. 할머니는 “적적하지만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기에 지금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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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원당은 어떤 이유로 이곳에 있나요?
 
『여헌집』의 모원당기에 의하면, 모원당은 여헌 장현광 선생(1554∼1637)의 가옥이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거처할 곳이 없자, 문인 장경우를 비롯한 문도와 친척들이 1606년에 건립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청천당은 여헌 선생의 자제인 청천당 장응일(1599∼1676)이 건립한 당우로서 학문을 닦고 교유의 장으로 삼았던 곳인데, 1607년에 세워진 것이다. 여헌 묘우는 선생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으로 효종 1년(1650)에 세운 것이다.
 
모원당을 세운 여헌 장현광 선생의 역사적 위상은 너무 널리 알려져 있어 재론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선생은 조선중기 문신이자 성리학자로 본관은 인동, 자는 덕회, 호는 여헌이다. 23세가 되던 1576년(선조 9)에 재능과 행실이 알려져 조정에 천거되어, 주어진 관직에 대해 진퇴를 거듭하다가, 1602년 공조좌랑과 형조좌랑을 역임하였고, 이후에도 많은 벼슬이 주어졌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1624년 사헌부 장령, 사헌부 집의, 공조참판, 1626년 형조참판을 거쳤다.
 
1636년 12월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의 궐기를 촉구하는 통문을 돌리고 군량미를 모아 보냈다. 그러나 이듬해 2월 삼전도에서 인조가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입암산에 들어가 반년 후에 죽었다. 여헌 선생은 관료로서보다 일생을 학문과 교육에 바쳤으며, 재야의 산림으로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그는 한강 정구에게 수학한 적이 있어 퇴계학파로 분류되지만, 이기론이나 심성론에서는 퇴계 선생의 학설과는 일정한 차이가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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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원당을 지키는 또 하나의 존재
 
「모원당 회화나무 구미 여헌 장현광 종가」라는 제목의 책에 회화나무에 대한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무에 대한 내용은 별로 없고 조선조 영남 사림의 거두인 인동출신 남산파 여헌 선생에 대한 내용뿐 이었다.
 
처음으로 족보를 정리하셨다는 황상파 시조 죽정공에 관한 얘기도 중간에 나온다. 또 선산, 특히 구미 인동이 우리나라 성리학의 큰 줄기 가운데 하나인 사림학통의 중심지라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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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림 학통은 이 지역출신 야은 길재와 그의 제자 김숙자, 김종직, 그리고 다시 김광필과 정여창에 이어 유림의 거두 조광조 등으로 이어진다. 죽정공은 스승 정암이 능주로 유배를 가자 함께 따라가서 사사될 때까지 그곳에 머물다 고향으로 돌아와 관직에 대한 생각을 접고 학문에만 정진했다.
 
죽정일고 등 관련서적을 읽고 또 새로 나온 이 책을 한 번 읽어보면 선조들이 어려운 시련 속에서도 평생토록 스스로의 몸가짐을 올곧게 바로 지키며 정진한 투철한 삶을 엿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 인동지역에서의 모원당
 
인동지역의 인구는 웬만한 군부보다 더 많은 인구를 자랑한다. 인동동과 진미동이 도로를 사이에 두고 각기 다른 색깔을 가지고 너무나도 빠르게 변화되는 도심의 하루를 살아가는 곳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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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모원당은 도심의 빠른 변화 속에서 느림을 고집하면서도 조금씩 변화에 적응해 나가고 있다. 문중에서 관리하던 일들이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모르겠지만 현재까지는 관리인들이 바뀌고 바뀌면서 세월을 따라 흐르고 있다.
 
격동의 세월을 살았던 여헌 장현광 선생의 흔적은 고스란히 남아 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지 뒤돌아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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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도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세월을 거슬러 일제의 수탈을 오롯이 견뎌야했던 그날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교훈은 무엇인지조차도 잊고 살아가고 있지나 않은지 모를 일이다. 그 당시 빨랐다면 열차 말고는 달리 없었을 교통수단이었을 말하지만, 지금은 구미에서 서울조차도 하루 만에 왕복이 가능한 시대가 되어 버렸으니 정말 격세지감(隔世之感)이 아니면 다른 말로 표현이 어려울 지경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격동의 세월의 한가운대에서 목숨하나 부지하기 어려웠을 당시에 우리 선조들이 자신의 몸을 초개처럼 던져 조국의 독립을 외치고 싸우며 완전한 독립을 이룬 조국의 미래를 꿈꾸고 살았을 그들의 애환과 나라사랑과 애민정신(愛民精神)을 굳이 기억해달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한번쯤 기억하고 도심 속에서 조용히 자리하고 있는 모원당을 찾아 먹먹한 가슴을 달래는 시간이라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 에필로그(epilogue)
 
갑자기 고려말기와 조선 초기를 살았던 야은 길재(吉再)선생의 회고가가 생각이 난다. 「오백년도읍지를 필마로 도라드니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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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쉽게 우리말로 써보면 “한 마리 말을 타고 고려의 도읍지를 돌아보니 산과 물은 옛 모습 그대로 변한 것이 없는데 사람들은 온데간데없구나! 아~태평성대의 세월이 꿈이었단 말인가?”라고 표현이 된다.
 
모원당의 넓은 사랑에 많은 사람들이 선생을 찾거나 다양한 이야기가 오고 갔을 것이지만 이제는 찾는 이가 별로 없이 관리인이 자리를 지키는 썰렁한 모습이 되어 버렸는데 만약 선생이 이곳을 찾는다면 길재 선생과 같은 마음이 되지 않을까 한다.
 
언제까지 문중에서 관리하도록 그대로 방치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이제는 이 한산한 모원당이 새로운 교육장소가 되고 미래의 동향들이 조국의 미래를 꿈꾸는 공간으로 변모되기를 바라는 것은 혼자만의 생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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