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우리 조상들은 죽어서 고분군을 남겼다고 한다면 과연 맞는 말일까?
다른 지역과 달리 구미시 일원에는 낙동강을 끼고 동서 사방으로 여러 무리의 고분군들이 분포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강의 동쪽에 해당하는 해평면 일대가 고분군 분포의 중심지다.
지역에 역사적인 가치가 있는 고분군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다. 어찌 보면 지나간 역사를 연구하고 그 시대를 추정할 수 있는 자료로서 가치가 있기에 학자들은 조사를 통한 연구를 하고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체험하는 공간으로 활용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할 것이다.
여기에다 관리를 담당하는 공무원들은 세심한 관리로 원형의 보존이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또한, 아직도 수풀 속에서 과거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을 고분까지도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구미시 해평면 낙산리 산 96번지 일원에 자리 잡은 고분군은 선조들의 지나간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사례로서 역사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잘 관리하고 보존해 후손들에게 전해주어야 하는 것이 의무이기도 하다.
문헌들과 기록을 찾아서~
낙산리 고분군은 도로와 인접해 있어 접근성이 좋다는 장점이 있다. 그렇기에 조금만 다듬고 모양을 갖추는 문화재 공간으로 조성한다면 지역에서 자랑스러운 문화재가 될 것이다. 지난 1990년 10월 26일 사적 제336호로 지정되었지만, 아직도 허술한 부분이 많고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 많아 아쉬움이 남는다.
지리적으로 대구에서 25번 국도를 따라 상주 방향으로 따라가다가 해평면을 지나 일선교에 도착하기 직전 약간의 언덕같이 도로의 좌우에 대형봉토분(大型封土墳)들이 분포한 것이 보이는데, 이것이 구미 낙산고분군이다.
고분군에서 멀리 보이는 해발 691m의 냉산이 자리하고 있고, 서쪽으로는 예나 지금이나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을 향해 뻗어 기어코 낙동강과 접해 있다.
낙산고분군은 3개의 군집으로 나누어진다고 기록하고 있다. 25번 국도의 서편에 낙동강을 향해 말발굽 모양으로 형성된 구릉에 분포하는 것을 월파정산(月波亭山) 고분군, 그와 도로를 사이에 두고 동편의 북서에서 동남으로 길게 형성된 구릉에 분포하고 있는 것을 정묘산 고분군, 정묘산 고분군과 작은 계곡을 두고 북쪽에 남북으로 형성된 구릉에 분포하는 것을 불로산 고분군이라 부르고 있다.
구미 해평 낙산고분군은 위치상 동쪽의 형성된 구릉 지대에 분포되어있는 250여 기의 옛 무덤으로서 분포지역에 따라 오목야 고분군, 중리 고분군, 월파정산 고분군, 정묘산 고분군, 칠창동 고분군 등 작은 고분군으로 나눌 수 있다고 문헌에 기록하고 있다.
자료에 따르면 1989년 대구카톨릭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일부가 발굴 조사되었는데, 봉분은 대부분 원형이지만 표형인 월파정산 38호분도 확인되었고 인근에서 운반된 잔돌과 사립이 섞인 점토를 섞어 출조한 것이라고 한다.
낙산고분군 가운데 월파정산에서 확인되는 봉토분은 모두 81기로 확인된다. 고분들은 말발굽 모양의 능선 상부를 따라서는 대형분이, 능선의 사면을 따라서는 소형의 고분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봉토의 크기는 대형분은 높이가 15×4m 정도이고, 대부분은 10×2m 내외인데, 특히 작은 것은 5×0.3m 내외의 흔적만 남기고 있다.
해방 이후 구미지역의 고분군에 대한 학술적인 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한 관계로 대다수고분군들이 도굴되고 훼손되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듣기도 했으나, 1987년 효성여자대학교박물관에 의해서 선산지역 고분군의 분포가 재조사되고 낙산동 일대 고분군의 두 지점이 발굴 조사되었다는 자료가 남아 있다.
마지막으로~
낙산고분군에 대해서는 자료와 문헌들이 그리 많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우리 선조들이 현재까지 살아 있다면 그들을 통해서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을 것이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고분들과 약간의 유물들이 전부다.
그동안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시간으로 인해 그나마 당시의 시대 상황을 정확하게 전해줄 약간의 유물이 전부인 셈이다. 이제 이것들만이라도 연구하고 관찰해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전해주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소중한 책임이면서 의무가 되어 버렸다.
여러 차례 현장을 이곳저곳을 살펴보니 아직도 수풀 속에서 발견되지 못하고 관리의 손길에서 멀어진 고분의 외치는 소리를 듣는다면, 과거에 하지 못했다고 해서 한꺼번에 하기보다는 매년 조금씩이라도 고분군의 범위를 넓혀갔으면 한다.
선조들의 사연을 들을 기회가 우리에게 많지 않다는 것은 정말 아쉬운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선조들의 이야기가 멈춘 것은 아니고 현재도 진행형이라는 사실을 인식했으면 한다.
왜냐하면, 지금부터는 선조들의 사연을 담은 이야기뿐만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와 선조들의 이야기들을 멋지게 스토리텔링 해서 꾸미고 다듬어 아름다운 모습과 멋진 사연들을 전하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선조들의 문화가 위대하고 찬란했듯 현재의 사연들이 먼 훗날 후대의 사람들이 위대하고 찬란했다고 기억하고 보존해 준다면 그것만큼 보람된 일이 어디에 있을까?
문화라는 것이 그렇게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고 보태져서 신한류의 그림을 세계 속에서 펼쳐 보이는 것이다.
사진제공 : 타임뉴스 김이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