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혜 작가 개인전, 마이크로 유토피아-선산을 기억하다!
자신의 고향인 선산을 지키며 예술활동을 펼치며 후진 양성에 힘쓰고 있는 김선혜 작가는 오는 18일 '마이크로 유토피아-선산을 기억하다'라는 주제로 개인전 오픈식을 가진다고 전했다.
마이크로-유토피아의 실현을 꿈꾸는 김선혜 작가는 새로운 영토의 선산을 강조한다. 박초혜 홍익대학교 미술학 박사의 비평은 김 작가의 내면을 살펴보기에 적절하기에 다음은 그 비평의 내용이다.
홍익대학교 미술학과 박초혜 박사 비평김선혜 작가의 고향인 선산은 경상북도 구미시에 위치한다. 본래 이곳은 선산군이었으나, 1995년 구미시와 통합되면서 구미시의 명칭을 가지게 되었다.
선산은 과거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서, 영남 인재의 반은 선산에서 난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인재가 많았던 곳이다. 고려 말 성리학자 야은 길재(吉再)가 낙향 후학을 양성한 곳으로 한마을에서 15명의 장원급제자가 나와 장원방(壯元坊)이라 칭할 만큼 인재의 본향이라 불렸다.
조상들이 최고의 길상목으로 꼽은 회화나무는 왕이 하사할 정도로 궁궐, 서원, 선비의 집에만 심을 수 있었는데, 심으면 가문에 큰 인물, 학자가 난다고 한다. 선산에는 여러 그루의 회화나무가 있는데, 그녀의 작품에 회화나무가 드러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작가는 추억 속 선산을 유토피아(Utopia)로 표현하고 있다. 그곳에는 토끼, 참새, 강아지, 다람쥐 등 다양한 생물들이 함께 상호작용한다. 먹는 것도 사는 방식도 서로 다르지만, 자신의 것을 흔쾌히 드러내며 서로를 있는 그대로 수용한다.
누구 하나 소외되지 않고 힘들지 않은, 약육강식이 아닌 평화로운 자연이다. 서로는 각자의 자리에 만족하며 서로를 사랑스럽게 바라본다. 춤을 추듯 어우러진 꽃줄기의 움직임은 꿈같은 그들의 마음을 드러내는 듯 보인다.
이처럼 그녀의 선산은 욕망과 고민이 없는 곳으로 각자 다른 생물들이 서로를 침범하지 않으며 자유롭다. 작가는 평화가 가득한 곳에 관람자 모두를 초대하며 선산을 통해 조금은 쉬었다가 갈 수 있기를, 조금은 덜 힘들기를 바란다. 이는 회화나무의 형태를 보면 알 수 있는데, 나무는 자신의 몸통을 있는 그대로 내어 집을 제공한다.
우리가 한가로이 자연을 바라본 때가 언제였을까. 작가의 작품에 등장하는 자연은 항상 우리 곁에 있다. 하지만 우리는 주어진 삶이 너무 바빠서 그들이 함께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않으면 공존한다는 사실도 잊고 지낸다. 수많은 자극과 노출 속에서 한순간이라도 긴장을 놓쳤다간 흐름을 놓치지 십상이다.
너무 빨라진 시스템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우리는 몰입을 자처하고 있지만, 채도(彩度)를 유지하는 그녀의 맑은 색감은 푸른 자연과 새소리의 기억을 일으킨다. 작가가 하나하나 붓으로 찍어 만든 선산의 대지는 그녀의 기쁜 추억, 슬픈 기억들을 되새기며 새긴 것들이다.
추억으로 생성된 붓질은 대지의 집단으로서 집을 세울 만큼의 단단한 지면이 된다. 작가는 모든 기억을 기꺼이 밝은 색감으로 표현하면서 누구도 넘어지지 않는 포용의 땅을 만들고 있다.
이 모든 것을 관망(觀望)하듯 위치한 참새를 보자. 이들은 모두 작가 자신이다. 참새는 모두를 초대한 그 집이 계속해서 평안하기를 바라며 집 위에 머문다. 작지만 선명한 참새는 작품에서 노골적으로 집 주변을 서성이고 있다. 작가는 왜 이토록 관람자들의 휴식을 바라고 있을까?
작가의 유토피아는 마이크로 유토피아(Micro Utopia)로 정의할 수 있다. 본래 마이크로 유토피아는 니콜라 부리오(Nicolas Bourriaud)가 일시적이고 소규모의 화기애애한 순간과 대인 관계 실험의 프로젝트를 설명하기 위해 제안한 것이다.
그는 예술이 상업적 특성과 의미론적 가치를 넘어 사회적 틈(interstice)의 전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부리오에 의하면 예술은 자본주의 체계에 개방적이고 조화롭게 편입되면서 이 체계 안에서 시행 중인 교환의 가능성과는 다른 가능성을 암시할 수 있다.
김선혜 작가는 진정한 유토피아를 일으킬 시작점으로 선산을 제시한다. 단순히 아름다운 선산을 보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그녀의 유토피아는 관람자들을 통해 이루어진다.
다시 말하자면 작가는 변하지 않는 휴식과 공존의 가능성을 ‘보기’를 통해 제공하고 일시적인 휴식을 누린 관람자들이 주어진 환경에서 공존을 시도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매우 과도한 시도로 보일 수 있겠으나, 랑시에르(Jacques Ranciere)가 말해왔듯이 '보기'가 수동적일 것이라는 생각은 편견이다.
오히려 보기를 통한 관람자의 번역(飜譯) 작업은 그들을 능동적인 해석가로 만들며, 작품은 관람자 각자가 능력을 발현시킬 무대가 된다. 그녀의 선산은 관람자 개개인이 가진 소화력으로 재입력되어 행동을 일으킬 자양분이 되는, 마이크로 유토피아가 될 것이다.